내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그것은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 예수님을 믿고 살지 않을 때도 나는 기쁨으로 살았다. 그렇게 술을 자주 많이(주량도 센 편이라 젊었을 땐 어머님이 나는 술을 안 먹는 줄 아실 만큼 표가 안 날 정도였다) 마신 것도 술 먹는 게 기뻤기 때문이고 특히 빈속에 마시는 폭탄주 한 잔의 맛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그랬던 자가 지금은 맥주 한 모금에 오바이트를 한다)
술뿐이었나? 이념과 이데올로기, 사회의 불합리함의 개선에 빠져서 학생운동을 할 때는 마치 내 스스로가 뭐라도 된 듯이 그 일들이 기뻤고, 사회인 야구단을 만들어 100명이 넘는 회원들에 가족까지 치면 200명이 넘는 인원이 관광차를 빌려 놀러도 다니고, 여름이면 야구방망이 서너 개를 넣은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제주도 전지훈련까지 이 모든 게 재미와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외에도 애견 동호회, 사진동호회 모두 직접 만들어서 수백 명의 오프라인 모임 조직으로 성장시키고, 전화번호에 저장된 연락처만 해도 수백 명이 넘을 만큼 아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 그들은 모두 다 내 곁에 없다. 어찌 보면 내가 공을 들였던 대상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뿐이었지만 반대로 아마 그들은 나한테 배신감을 느낀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서로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존재들이 아닐까?
직장을 다닐 때는 능력을 인정받아 스카우트도 당해봤고 특히 주식은(자격증 보유) 나름 일가견이 있어 상당한 수익을 내어 아내에게 기분 내 듯 보너스를 줄때는 날듯이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기쁨들을 돌이켜 보면 다 값싼 기쁨이었음을 예수님을 알고 나서 나는 깨달았다.
기쁨... 이제 우리는 삶의 기쁨을 새롭게 적용해야 한다.
신앙생활 수 십 년, 수년을 하면서도 아직도 일차원적인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마트의 장난감을 갖는 기쁨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어린이와 같은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것이다.
기쁨의 질을 한 단계 높여야 한다. 예수님은 나와 우리 가정에 차원이 다른 기쁨을 제공해 주시는 분이다. 그것은 세상의 물질의 복도 아니고, 건강에 대한 감사도 아니고, 자녀의멋진 대학이나 회사의 입사도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이 미처 느끼지 못했던 그동안 맛본적도 없는 그런 기쁨을 하루하루 인도하시는 분이다.
오늘 하루 무엇에 재미를 느끼고 있는가?
직장에서 인정받고, 홈쇼핑에서 주문한 물건이 택배로 와서, 좋은 아파트에, 좋은 차에, 좋은 대학에 입학한 자녀의 소식에 기뻐하고 즐거워 하고 있다면, 그런 것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추구하는 즐거움과 별반 다르지 않는 기쁨의 삶이다. 그게 바로 나 자신의 현재 정체성이다.
나는 지금 예수를 믿고 있으며 그 분이 나를 사랑해서 한 줄한 줄 정성것 적어서 보내주신 러브레터 성경을 읽는 재미에 빠져사는 기쁨을 누렸으면 한다.
내가 신학을 하면서 가장 좋아하고 딸에게도 늘 이야기 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조는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다. 나를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는 삶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 그런 기쁨을 아는 자로 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분을 알아야 하므로 그분이 남기신 성경을 읽어야 한다.
바로 그것은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 예수님을 믿고 살지 않을 때도 나는 기쁨으로 살았다. 그렇게 술을 자주 많이(주량도 센 편이라 젊었을 땐 어머님이 나는 술을 안 먹는 줄 아실 만큼 표가 안 날 정도였다) 마신 것도 술 먹는 게 기뻤기 때문이고 특히 빈속에 마시는 폭탄주 한 잔의 맛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그랬던 자가 지금은 맥주 한 모금에 오바이트를 한다)
술뿐이었나? 이념과 이데올로기, 사회의 불합리함의 개선에 빠져서 학생운동을 할 때는 마치 내 스스로가 뭐라도 된 듯이 그 일들이 기뻤고, 사회인 야구단을 만들어 100명이 넘는 회원들에 가족까지 치면 200명이 넘는 인원이 관광차를 빌려 놀러도 다니고, 여름이면 야구방망이 서너 개를 넣은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제주도 전지훈련까지 이 모든 게 재미와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외에도 애견 동호회, 사진동호회 모두 직접 만들어서 수백 명의 오프라인 모임 조직으로 성장시키고, 전화번호에 저장된 연락처만 해도 수백 명이 넘을 만큼 아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 그들은 모두 다 내 곁에 없다. 어찌 보면 내가 공을 들였던 대상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뿐이었지만 반대로 아마 그들은 나한테 배신감을 느낀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서로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존재들이 아닐까?
직장을 다닐 때는 능력을 인정받아 스카우트도 당해봤고 특히 주식은(자격증 보유) 나름 일가견이 있어 상당한 수익을 내어 아내에게 기분 내 듯 보너스를 줄때는 날듯이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기쁨들을 돌이켜 보면 다 값싼 기쁨이었음을 예수님을 알고 나서 나는 깨달았다.
기쁨... 이제 우리는 삶의 기쁨을 새롭게 적용해야 한다.
신앙생활 수 십 년, 수년을 하면서도 아직도 일차원적인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마트의 장난감을 갖는 기쁨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어린이와 같은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것이다.
기쁨의 질을 한 단계 높여야 한다. 예수님은 나와 우리 가정에 차원이 다른 기쁨을 제공해 주시는 분이다. 그것은 세상의 물질의 복도 아니고, 건강에 대한 감사도 아니고, 자녀의멋진 대학이나 회사의 입사도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이 미처 느끼지 못했던 그동안 맛본적도 없는 그런 기쁨을 하루하루 인도하시는 분이다.
오늘 하루 무엇에 재미를 느끼고 있는가?
직장에서 인정받고, 홈쇼핑에서 주문한 물건이 택배로 와서, 좋은 아파트에, 좋은 차에, 좋은 대학에 입학한 자녀의 소식에 기뻐하고 즐거워 하고 있다면, 그런 것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추구하는 즐거움과 별반 다르지 않는 기쁨의 삶이다. 그게 바로 나 자신의 현재 정체성이다.
나는 지금 예수를 믿고 있으며 그 분이 나를 사랑해서 한 줄한 줄 정성것 적어서 보내주신 러브레터 성경을 읽는 재미에 빠져사는 기쁨을 누렸으면 한다.
내가 신학을 하면서 가장 좋아하고 딸에게도 늘 이야기 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조는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다. 나를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는 삶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 그런 기쁨을 아는 자로 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분을 알아야 하므로 그분이 남기신 성경을 읽어야 한다.